건축학 개론

Movie/2012 2012.04.08 16:31



그냥 머 봤는데..누구 이야기처럼 남자들의 첫사랑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좋았을까? 

나에게는 엇갈리고 상처투성이인처로 돌아보게 된 것은 아닐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은 아닐까?

혹시나 말이다. 내가 누군가에게는 쌍놈이었을 수도 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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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코와 리타

Movie/2012 2012.04.08 16:26





퇴근하다가 라디오를 들었다. 그러다가 나온 음악들이 좋아서 영화를 찾아보고 보았다. 스토리 라인 자체는 사실 그렇게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음악들은 계속 깔리고 그 음악들이 전체적으로 이 애니를 잘 나타내고 있는 거 같다.


쿠바를 배경으로 노회한 음악가를 회상하는 것에서 드는 생각이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애니 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티스트들이 직접 연주하는 것이 적은 대신에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것이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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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결혼할 여자가 사라진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내가 알던 여자에 대해서 실은 내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작자인 미야베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나에겐 전혀 없다. 아마도 한동안 소설 책을 멀리하고 사회 현상이나 역사책을 들여다본다거나 아니면 어줍잖게 자기계발에 몰두한 탓일 것이다. - 그렇다고 자기 계발이 잘 된 상황도 아니고 사회현상을 내 나름의 시각으로 잘 설명할 수 있을 만큼의 식견을 가지게 된 것도 아니다. 단지,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라는 데에 매몰된 탓이다.

화차의 뜻이 악행을 저지른 불의 수레로 지옥을 향해가는 내릴 수 없는 것이라면 사실 우리 모두는 한두번씩은 법이나 도덕을 어긴 적이 있거나 그것을 어기려는 행위를 한 기억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상대적으로 크다든가 아니면 작다든가 하는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에 우리는 종교를 믿고 구원받길 원하는 것이다. - 신이 인간을 구원한다기 보다는 인간이 먼저 인간을 용서하고 나서 그 다음에 신이 구원을 해주던가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갑자기 영화 밀양이 생각나서 말이다. 자기 딸을 죽인 인간을 교도소에 면회가니 신에게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는데,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왜 신이 살인자를 용서하는가라며 절규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사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시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사람이 그것을 피하려 타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 사람의 신분을 뺏는 그런 이야기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것을 개인의 문제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했다. 왜냐하면 본인이 원하지도 않던 삶으로 가는 데, 그 개인만 부각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신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앞서서 내세우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반복적인 개인문제가 그 사회에 나타난다면 그것은 사회적인 구조의 문제에서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고 그걸 극복하고 잘 사는 사람도 있으니 그걸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논리였던거 같은 데 말이다. 

이런 논리가 극단화되고 개인화되면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타인의 삶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것일 것인데, 단지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타인을 죽음으로까지 내몰면서 살는 것이 옳은가?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끝부분이 약간 좀 구조적인 문제에 집중하면서 나아갔으면 했지만 아쉬움이 남는데, 이 영화에서는 김민희가 아주 그 배역에 잘 어울리게 나왔다는 것이다. 머랄까 잘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영화속에서의 옷빨만큼이나 그렇게 잘 보였다. 
- 이건 거의 김민희영화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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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영화라는 이야길 듣고 갔다. 그래서 기대를 더욱 했다. 왜냐하면 최근에 나 스스로 안 건데 내가 전개가 빠른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적인 무성영화식의 이야기라면 당연하게도 전개가 그리 빠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더구나 영화의 스토리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들어서 당연하게도 흥미가 생겼다. 그런 상태에서 조용한 날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영화를 보러 가게 된 것이다. - 차 사고가 나서 내 차는 정비공장에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것인데, 이 영화는 무성과 현대적인 유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물론 두 배우가 하나는 무성을 대표하는 배우로 나오고 하나는 유성을 대표하는 배우로 나온다.  그런데 이 둘의 사랑이야기는 사랑이야기로도 훌륭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느낀 것은 시대를 대표하는 상황에 대해서 둘을 잘 엮어내서이기 때문이다.

유성이 무성을 사랑한다. 무성도 그 사실을 너무 잘 안다. 그럼에도 무성은 약간 무심하다. 결국은 잘 끝났지만 역시 살포시 드는 생각은 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감독이 의도한 바는 혹시 시대가 변해도 그 뒤따라오는 것은 결국은 그 윗대를 존경하는 것에서 출발하고 그 근본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한다. 영화의 말미에는 유성을 거부하는 무성배우가 결국은 유성배우와 같이 영화를 찍는다. 그런데 말이다. 그 마지막 영화에서는 말이 필요없다.  결국은 사람들끼리 이야기하고 감정을 나누는 것에는 그렇게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 마지막 영화는 그 고전적인 프레드 아스테어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표현력의 부족이 결국은 많은 오해를 낳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고 나서 들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이 가장 좋았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을 은밀하게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아닌 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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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 반 산트의 영화다. 개인적으로 이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화면의 전개 속도가 나랑 맞는다. 다른 사람들은 느리다고 하는 데, 나에겐 잘 맞는 편이다. 영화나 음악은 상대적인 편이다. 그러니 당연히 취향이 존재하고 타인의 그것을 욕하거나 폄하할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장례식장에서 출발한다. 한명의 소년과 한명의 소녀, 한명의 유령에 대한 이야기이다. 실은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한 영화이다. 죽음과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가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을 한다. 구스 반 산트는 이전의 몇 편의 영화에서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 엘리펀트, 파라노이드 파크, 라스트 데이즈 등은 그런 영화들일 것이다. 
- 그의 작품이력을 쭈욱 살펴보니 어쩌면 맷 데이먼/벤 에플렉과 함께 했던 굿윌헌팅이 가장 상업적인 영화가 아니었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가장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고 엘리엇 스미스가 음악을 맡기도 했던 ...

영화는 3개월 시한부의 소녀인 애나벨과 부모의 죽음으로 3분여동안 죽음을 맛보았던 에녹, 에녹에게 보이는 히로시라는 카미카제 유령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중추는 애나벨과 에녹이 장례식장에서 마주치면서 시작한다. 매일 타인의 추도식에 참석해서 그들의 얼굴을 보는 에녹에게서 죽어버린 자들은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듯한 모습들이 나온다. 실제로 에녹은 히로시와의 대화에서 자살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로시는 그것은 비겁하다는 식으로 에녹에게 이야기를 하고 죽어버린 자에 대해서 존경심같은 것이 없다고 에녹에게 이야기한다. 
이에 반해서 재발해버린 암으로 인해서 3개월 시한부를 받은 애나벨은 삶에 대해서 남은 시간 동안에 할 수 있는 최대한 많은 일들과 시간들을 보내려고 한다. 에녹과 애나벨이 사귀게 되는 것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연결고리로 만들어진 띠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명의 주요 인물을 보면 마치 죽음에 대한 연결고리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명은 이미 죽어버린 유령, 한명은 이제 곧 죽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한명은 잠깐동안의 죽음을 맛본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점에서 고리처럼 연결되어진 하나의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죽음이 곧 상실이라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기준이라고 보면 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을 까 싶기도 하다.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히로시의 편지이야기는 죽음을 앞둔 우리의 어쩌면 순진한 고백일지도 모른다. 부치지 못한 죽기전에 쓰는 편지에서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에게 고백하는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가져야 할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기보다는 살아있는 동안에 사랑하고 스스로롤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해주는 것은 또한 아니었는가 말이다. 

-뱀다리-
우린 언젠가 모두 죽는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로 살아있는 동안에 모든 것을 누리려하면 죽음은 좀 더 강력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그냥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멈추어서서 옆과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우리 모두에겐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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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다큐다. 글자 그대로 감독인 지민의 연애->동거 다큐이다.  사실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사실 잘 몰랐다. 임신테스트기의 두개의 선이라는 사실을 영화를 보면서 알았다. - 이런 무지함이라니.. 동거중에 아기가 생기면서 그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이 다큐는 한다. 나름 사회 운동을 많이 하고 진보적이라는 이들도 어쩌면 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데, 

그냥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는 거 보다는 이 영화의 줄거리랑 제작노트를 보고 스스로 판단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거 같다.  

http://goo.gl/j1NwO - 영화줄거리랑 제작노트 [Daum] 



근데, 내 생각에 결혼은 1대 1이면 할 수 도 있었을 거 같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그게 동거랑 다르지 않고 결혼을 하면 가족대 가족으로 결합이 되고 얽히는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도망가듯이 한적도 있었던 거 같다. 사실은 내 짐을 상대방에게 얹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강했다. 그냥 나 혼자 힘들면 되는 데 그런 생각이 들었기도 했다. 근데 그걸 다 받아주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지만 말이다. 결국은 내가 먼저 견뎌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옆사람도 견뎌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못견뎌내니깐 옆사람도 못 견뎌내는 거 같다는 생각이 지금 이 순간 들었다. 

불안함, 불투명함같은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도 드는 데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연말에 이 비슷한 이야기를 어느 분에게 하니 " 그래도 해봐" 라고 해주셨는 데, 무라키미 류의 소설 제목처럼 결혼은 정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검붉은- 블루일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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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 영화에서 참조



영화는 과거의 석궁 테러 사건을 기초로 재구성한 것이다. 사건의 요지는 이것이다. 부당한 판결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수학 교수가 일명 석궁테러를 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것은 위키피디아의 그것을 참조하면 될 듯하다.

 http://goo.gl/uRXS3 [위키피디아의 석궁테러 사건 관련 일지] 

영화 자체의 구성만 보면 탄탄하고 재미있다. 내 관점에서 보면 몇 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었다. 일단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트위터에는 영화의 실제 변호사와 진중권의 설전이 있었다. 이 부분에서 아직 판결문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판결문 자체를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견고한 것인가라고 의심이 필요하다라는 것이 전제조건의 가장 강력한 조건이 될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나는 최근에 읽었던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에서 판검사들이 법리에 일차적으로 의존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직관적인 판단을 한다는 사실에 나름 충격을 받았다. 사법고시를 통과한 이들은 사실 이 나라의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이고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것이 그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구실이 된다는 점에서도 일정부분 난 동의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항상 옳은 판단을 하고 그들의 판결을 믿을 수 있다고 보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보기엔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서 아주 강한 반발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결과적으로 각설하고 내가 판단하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첫번째는 법관에 대한 위해의 문제가 그 것이고, 두번째는 실체적 진실에 대한 문제이다. 전자는 그 교수가 분명히 석궁을 들고 위협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총론에 대한 것인데 이 부분은 분명하다. 후자는 각론에 대한 것인데 활을 쏘았는가? 하는 것과 그것으로 그가 상해를 입었는 가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이 든다.

내가 판사라면 전자에 대한 것은 그 교수에 대한 유죄가 될 것이고 후자에 대한 것은 대상자와 기소자인 판검사는 유죄가 되고 교수는 무죄가 될 것이다. 즉, 누군가가 그랬듯이 그가 잘해야 집행유예일수도 있을 것이다.  -  특히 후자는 피고인 김교수가 주장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가정하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그날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가? 

PS.
클리앙에서 링크된 글을 하나 가지고 왔다. 다른 시각이다. 이글의 논지에서 읽어보면 영화는 허구에 가깝다.
http://clien.career.co.kr/cs2/bbs/board.php?bo_table=park&wr_id=10350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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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된 인력거

1999년 인도에서 <오래된 인력거>의 주인공 ‘샬림’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이성규 감독은 지열 70도의 아스팔트 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맨발로 인력거를 끄는 샬림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 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력거꾼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샬림을 단순한 피사체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써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모습까지 감동적으로 카메라에 담아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과 집념은 젊은 인력거꾼 ‘마노즈’와의 인연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마노즈는 자신의 아버지가 지주들에게 무참히 살해된 아픈 상처를 갖고 있는 청년이었다. 이를 알게 된 이성규 감독은 카스트 전쟁을 촬영했던 10년 전 자료를 뒤져 어린 마노즈의 모습을 찾았고, 그의 사연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그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운명 같은 만남으로 더욱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오래된 인력거>는 다양한 삶들이 중첩되어 있는 캘커타의 인력거꾼들의 여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내 깊은 울림을 전한다.  


위의 줄거리는 Daum 영화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전체적인 흐름은 위와 같다. 인력거꾼인 샬림은 가난때문에 가출해서 가방공장에서 일을 한다. 출장으로 인도에 거의 총 기간으로 따지면 거의 8개월 가까운 기간을 있었다. 그때는 오로지 일만 할 때였지만 출퇴근을 하면서 보는 생경한 풍경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벌판에 그냥 비닐 텐트를 치고 사는 사람은 누구인지? 혹은 그냥 길바닥에 자는 사람들은 왜 그러는지? 평균적인 이들의 수입은 얼마인지?  이런거 말이다. 

소위 말하는 불가촉 천민과 묵시적인 카스트제도의 용인, 그것과 교육제도의 연결, 그리고 그것이 바로 수입과 연결되는 이 불편한 구조가 나를 아주 힘들게 만들었다. 그냥 닥치고 난 일만 하다가 올 뿐이기도 했지만 차를 타고 가는 데, 잠시 정차했을 때 씻지않은 듯한 3-4세의 어린 소녀가 외국인인 나에게 돈을 달라고 창문을 두들릴 때, 기사는 소리를 지르며 멀리 보내는 그 장면을 보면서 왜 나는 이렇게 부끄러운 것인지 모르겠다. 그냥 나만 잘먹고 잘 살면 되는 데 말이다. 

샬림은 인력거꾼으로 돈을 모아서 오토릭샤(삼발 오토바이)를 사서 보다 나은 수입을 얻어서 가족을 편안하게 하려고 한다. 그게 그의 꿈인데, 그것이 가족들이 병들고 아프니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더구나 시는 인력거가 빈곤의 상징과 비인간적이다라는 이유로 없앴다고 한다. 결국은 그들의 다시 아주 저 나락으로 도시 최하층 빈민으로 떨어질 것이다. 정녕 이 세계는 바뀌어지지 않는 것인가? 이토록 고달픈 삶의 흔적들이라니 말이다. 그 수레바퀴라니..




2. 밍크 코트
 
엄마가 쓰러졌다. 근데, 병원에서 몇달이 지났는 데도 가망이 없댄다.  그래서 호흡기 떼자고 한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가족들이 다들 크리스챤인데 기도만 열나게 하면 그냥 나아질까? 시간이 많이 지나서 병원비 등등해서 지쳐가는 이 시국에 호흡기 떼자는 말에 그냥 동의하지 않는 가족이 이상한 것인가? 누군가가 죽으면 누군가는 살아가고 태어난다. 죽음과 삶의 교차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산다는 것은 긍정적인 말이고 죽어간다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우린 모두 살아가면서 소모하면서 죽어가고 있지는 않나? - 탄생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말을 난 하고 싶은 것 뿐이다.

위의 이야기가 바로 밍크코트의 줄거리다. 조금은 제약된 공간과 가족들간의 인물 갈등도 있다. 그러면서  아주 힘든 소재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배우들 연기도 현실감있고 좋았다. 그런데, 정말 좀 아쉬운 점은 인물을 클로즈업할 때도 핸드헬드를 쓴다는 거였다. 아마도 연출하시는 분이 이유도 있었겠지만 배우를 클로즈업해서 감정 전달을 관객에게 시키려고 하시는 건 알겠는 데, 핸드헬드로 하다보니 클로즈업한 것이 자꾸 흔들리고 엇나가고 있어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옥상가서 기도하는 씬에서 특히 그랬다. 약간 아쉬웠다고 해야 할 거 같다. 그 장면에서는 좀 말이다. 그냥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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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켄 로치의 세번째 영화이다. 두편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랜드 앤 프리덤이었다. 앞서 본 그의 두편의 영화에서는 아주 다분히 역사성과 시대성이 배경이 되었다. 그것은 아일랜드 독립과 스페인 내전이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최근에 스페인 내전 서적을 읽고 있기도 하다.

1969년작인 이 영화 케스는 새로 생긴 영화의 전당에서 보았는데, 극장이 전에 있던 시네마 테크보다 훨씬 낫더라는 생각이 든다. 멀티플렉스처럼 만들어놓았는데, 개인적으로 의자가 편해지고 스크린이 더 커진거 같아서 좋았다. 물론 상영관이 증가하면서 담당 프로그래머는 죽어나고 있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말이다.  

영화를 좀 찾아보기 시작하면서 좋아하게 된 두 감독이 있는 데, 켄 로치는 그중의 하나다.
- 나머지 하나는 구스 반 산트이다. 아이다호를 만들고, 굿윌헌팅, 라스트 데이즈를 감독했던 그 감독말이다.

켄 로치의 영화에서는 전에 보았던 두편에서 시대성이 아주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배경자체가 시대적인 요소들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 탄광에서 일하는 형과 같이 사는 빌리는 거의 미래가 확정적인 상태이다. 광부가 되거나 아니면 그냥 동네에서 굴러먹는 그저그런 사람이 되는 것 뿐이다. 가난해서 학교에서도 체육복을 살 수 없고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한다. 여기서 빌리는 어린 매를 구해서 매 훈련에 대한 책을 훔치고 매를 훈련시킨다. 이 매의 이름이 케스였다. 결과적으로는 이 매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게 되지만 동네에서 왕따당하고 왜소한 소년이 매를 훈련시키면서 애정을 갖는 것은 자신의 처지에서 몰입한 대상이 그 대상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영화의 장면에서  매의 훈련 장면을 보기 위해서 찾아온 선생과 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빌리가 매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에서 자신과 매를 그 부분에서 동일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는 그냥 매는 매이고 길들여지지 않으며 훈련시킬 뿐인데 다른 사람들이 빌리가 매와 같이 다니면 길들여진 것이냐고 이야기를 하냐는 것이다.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이 부분에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지 않을까 한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이 빌리의 의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런 루저정신같은 것이 영국내의 노동자층의 기본 정서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영화에서 학교교사들의 발음은 약간씩 들리는 데, 빌리가족과 주변인물들의 발음은 거의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이 영화 스코틀랜드 영화인가? 아일랜드 영화인가? 왜 단어 하나도 모르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어쩌면 이것조차도 묵시적인 계급을 나누는 어떤 장치같은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으로 좀 웃긴 장면은 체육시간에 축구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 교사가 자기가 붉은 유니폼을 입고 나와서 맨유라고 하면서 상대방은 머할래 묻더니 스퍼스 한다고 하고, 패널티 아닌거 같은데 자기가 심판이라서 그냥 패널티주고 직접 차면서 안들어가니 다시 차고 결국 지니깐 골키퍼였던 빌리를 괴롭힌다. 그냥 괴롭히는 장면이전까지는 좀 웃겼다. 빌리를 샤워실에 넣고 추운 날씨에 찬물로 틀어대는 것만 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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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kes, 빌리, 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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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 그날에 우리 - 어반 자카파 

나는 전에도 썼던거 같은데 야밤 제일 마지막이나 아침 조조로  영화보는 것을 좋아한다. 한때 누구와 같이 다녀야 할 때는 빼고서 말이다. 그냥 혼자서 가게 되면 그때가 좋다. 그것은 온전하게 영화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말로 그냥 때려부시는 영화나 돈을 얼마나 퍼부었는지 나타내는 영화는 그런 집중할 필요도 없다. 난 이야기가 있는 영화가 좋다. 그럴려면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영화는 사실 내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마이너적인 영화고 돈 안되는 영화이기 때문인데 우연히 상영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게 되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죽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지구상에서 모든 생물은 탄생과 함께 죽어가기 때문이다. 죽는 다는 것은 우리게 필연이고 그것을 현재 시점에서 나는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삶에 후회하지 말고 살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아주 먼 지구의 탄생과 진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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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르페디엠 2011.11.15 1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 스틸컷이 꼭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군요.
    지금의 삶에 어느정도라도 후회하지 않으려고
    지금 댓글을 달았고, 이번 주엔 '신들의 전쟁'을 보려고 해요.
    타셈 싱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트리 오브 라이프..아직 극장에 걸려있으려나..뒤지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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