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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13 고통 - 드 리쇼,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 러셀, 안철수의 힘 - 강준만 (1)


최근에 읽은 몇 권의 책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길 하고자 한다. 


고통 - 10점
앙드레 드 리쇼 지음, 이재형 옮김/문학동네

이 책은 사랑이야기다. 근래에 읽은 소설중에서 모니카 마론의 슬픈짐승과 함께 가장 기억나는 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 장 그르니에가 알베르트 카뮈에게 권한 소설이라는 데, 왜 권했는 지는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한쪽은 불장난, 한쪽은 모든 것을 걸어버린 사랑. 그것이 몰고오는 고통. 모든 것을 던져버린 이야기가 이 안에 있다. 과연 모든 것을 던진 이에게 돌 던져서 나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가 현실있게 온다. 이런 것은 당연하게도 비극적인 이야기로 다가온다. 1차 대전 이후의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날법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8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범우사


일단 서점에서 이 책값이 쌌고 그리고 제목에서 당겨서 읽었다. 철학자인 러셀이 자신은 왜 기독교도가 아니며 과학을 믿는지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온다. 강연했던 것을 묶은 것인데 어렵다는 느낌도 있다 사실 한번 읽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런 부분을 시간이 좀 더 지나서 내공이 쌓인 후에 다시 읽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든다. 



안철수의 힘 - 6점
강준만 지음/인물과사상사

요즘 화제가 되는 안철수의 생각이 아닌 힘이다. 강준만이 쓴 이책으 1/3정도만 안철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전체적인 대선주자들의 판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저자가 왜 안철수를 지지하는 지에 대해서 쓰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저자가 안철수를 지지하는 부분에서 가장 좀 크게 와 닿는 부분은 역시 안철수가 기성정치인들에게 빚진 부분이 없어서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인데.. 과연 그럴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대선주자가 되면 그에게 줄서려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그것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린 사회지도자 하나를 시궁창으로 밀어넣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판단 유보다. 왜냐면 개론적인 입장만 표명한 상태이고 각론은 아직 나오지 않아서 좀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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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daum.net/godwithus BlogIcon 구성학 2012.11.19 16: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의 저자 버트란트 럿셀의 글이 번역되어 서점에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92년의 짧은 인생을 살면서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 큰 영광을 누렸다. 그가 자기 스스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강연하던 때는 1929년 근간이다. 그때 한국은 일제 감점기에 있었고 세계는 전쟁의 포화로 인해 곳곳에 상처 투성이였다. 얼마나 존재를 누리고 산다고 서로를 향하여 포탄을 쏴대며 죽이고 죽는 살육의 현장에 서서 인간의 포악을 지켜본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기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식이 있었고 지성인이었으며, 사람이 무엇인가를 안다고 생각했으며 남의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지성인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사람을 낳고 인물을 낳는다고 할까?
    국민의 대표라고 스스로 자처하고 등장한 안철수가 대통령의 자리에서서 국민을 이끌어 보겠다는 소명을 받아 일어서서 한발 한발 앞으로 아나가고 있다.
    국민이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선택하지 않을 것인지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동인은 안철수도, 국민자신도, 제2의 인물도, 지성인들도 아닌 바로 마음을 움직이는 존재라는것이다.
    럿셀이 중세시대 태어났다면, 20세기의 지성인으로 성장했을까?
    그가 왜 그토록 기독교인들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그가 어렸을때 자기 할아버지의 고통스런 인생을 보았고, 그 고통의 장본인들이 기독교인들이라는 강한 관념을 갖게한 사회가 럿셀을 비 크리스챤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지성인답게 자기의 감정을 감추고, 쉽고, 분명한 자세로 기독교에 관하여 집요한 설득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냈다. 달변가로 해박한 지식으로, 기독교인들이 대항할 수 없는 거리감을 갖게하였고, 100년이 다 가오는 오늘까지 그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한 신학자들이라 설교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독교안에 거하는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제각기 자기의 신학적 입장에서 자기의 주장을 가지고 있으나 1929년부터 지금까지 대학의 강단이나 혹은 온갖 강연에서 정치에서 혹은 사회나 문화를 장악한 럿셀 사상의 영향력은 기독교인이 결코 부술수 없는 장벽으로 교회와 대치하여 속수무책으로 기독교의 진영을 초토화 시켜 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변호하던 지성인이 자기의 세력을 잃고 방황하고, 호랑이 앞에 꼬리내린 강아지 꼴을 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처참한 모습이다.
    결국 교회는 세상에서 세상을 이끌고 가는 중심에 서 있는 권위를 모두 잃고 한 구석으로 내몰려 자기만의 세력을 유지하느라 급급하다가 점차 그 세력을 상실한체 꼬리는 내려야 하는 처지에 이르고 만 것이다.
    럿셀의 목소리는 갈수록 더 커가고,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힘을 잃어가고 영광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이 계시고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럿셀의 목소리앞에 맥없이 스스러지고 있다.
    럿셀은 죽었으나 그의말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화되어 아직도 사람을 움직이고,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감화되지 않고, 세속에 밀려 천덕꾸러기가 된 상태이다.

    하나님의 명예에 대한 손상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그 인내 앞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의 한 없으신 사랑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분노와 하나님을 향한 대항을 아주 잘알고 계신다.,
    친히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잘 아시는 것이다.
    럿셀이 그토록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기를 존재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인정할수 없는 그 이유를 이미 아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천덕꾸러기처럼 취급하고 대적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를 남보다 더 오랜 시간을 허락하셔서 92년이라는 생명을 유지하도록 보호하셨던 것이다.

    럿셀이 진정 사람의 본질을 알았을까?
    정말로 지성인이라고 자부한 자신의 지성에서 생성하는 수많은 지식들의 정체를 이해했을까?
    그의 생물체인 육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그 지식이 육체가 스스로 생성한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인 존재들로부터 받은 것인가? 그리고 그를 활동하게 하고 움직이게 한 그 지식들은 럿셀과 함께 흙으로 사라져 버렸는가 아니면 남아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이런 형이상학적인 본질들 앞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물에 관한 모든 것들을 터부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무지 몽매한 자세부터 고치지 않으면 럿셀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럿셀을 이해한다는 말은 그의 지식을 긍정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본질을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말할 것 없이 그가 부정한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신다.
    그는 지식의 하나님이시고 럿셀이 평생토록 자기의 육체로 사용하고 지식을 생성하여 수많은 젊은 이들의 지성에 지식으로 점령하여 사람을 사로잡은 그 지식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럿셀릉 지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그 지식을 사용한 댓가를 치르고 있다.
    생물체로서 하찮은 존재인 피조물이 만물을 존재하게하는 하나님의 지식을 92년동안 가졌고 그것을 휘둘러 자기를 존재하게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지식을 생성하여,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한 그 댓가로 영원히 자기의 의지를 상실한 감옥에 갇히게 될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때 스스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태어난 이루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생물체의 역할에 의해 지식을 효과적으로 적용하여 사용하게 된다.
    자기의 존재에 따라 적당한 옷을 입듯이 자기에게 맞는 지식을 기호에 따라 자기 육체에 적용하여 자기의 삶의 울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지식의 영역을 확장하고 넓혀 바다와 같이 무한대의 영역으로 나아가려는 욕구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기의 한계안에서 자기를 스스로 안착시켜 존재로서 시간을 허비한 낭비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모든 세계의 동력은 바로 사람에게 주어진 지식에 있다.
    럿셀에게는 사람들이 캐내지 못한 수많은 지식들을 수고스럽게 고뇌하여 자기의 몸에 실천적으로 적용하려는 강력한 욕구가 그를 깨웠고, 그 지식의 무한하고 증명할 수 없는 끝없는 세계에서 내려올 수 없는 상태에 놓인 것이다.
    그는 앞으로 달려 나아가기만 했지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존재에 관한 지식으로 고민해 보지 않았다.
    수천km에 달하는 바다속과 넓이에 맞추어 그물을 만들어 고기를 들어 올리려는 욕심을 가졌으나 정작 자기가 왜 그 일을 하는 존재인지 고뇌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럿셀은 세상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또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져 희생한다고 했으나 자기의 존재가 차지하는 위치를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사람을 몰랐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고, 하나님과 평행선을 달리는 럿셀의 대적에 대해 답하는 신학자와 설교자가 없다는 것이 더 안타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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