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한강 지음/문학동네 |
아주 아주 오랜만에 읽는 한강의 소설이다. 아주 오래전에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 데,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하나는 그 소설이 감정이 아주 깊게 패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 책을 읽을 때, 느끼었던 것은 박경리의 소설에서나 보이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었고 그보다 훨씬 나이 어린 작가가 그런 느낌을 뿜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놀라워했었던 기억이 있다. - 그게 내 여자의 열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소설은 두 명의 축이 있다. 여자와 남자인데, 한명은 독일에서 살다가 돌아온 이제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남자이며, 여자는 양육권을 뺏긴 희랍어 수강생이다. 그렇게 이 둘은 본인들의 갈등 구조를 가지고 희랍어 시간에 강의를 하는 자와 듣는 자로 만나게 된다.
내가 보기엔 둘 다 조금은 절망적인 미래에 대해서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지만 현실에서 보면 그냥 그렇듯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 들여야만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깐 독일에서 살다가 혼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배울 사람도 별로 없고 알아주주지도 않는 희랍어를 가르치는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경제력의 상실 문제로 양육권을 잃어버린 여자는 말도 잃고 그러고 나서 희랍어를 배우고 있다. 한명은 잃어가는 중이고 한명은 이미 잃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희랍어 시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서로 만나고 있지만 실은 상실의 고리를 연결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거의 죽어버린 언어를 통해서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과연 한글 고문을 읽고 써야 할 이유가 얼마나 될까? 그것은 일부 학자들이나 할 일이지 않을까?
상처를 가지고 있거나 상처를 가져야만 할 자들이라면 다른 자들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획득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그것이 때로는 자기애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지만 실은 그 상처들을 가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묘한 포장같은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므로 난 무슨 무슨 척이 싫은 편인데 이 책에선 그렇게 강한 척 하기 보다는 스스로를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읽은 한강의 소설에서 내가 느낀 점은 그것이다. 상처로 뒤덮여져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의 살아감에 대해서 아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이런 작가들이 맘에 든다. 괴상한 사건들로 덕지덕지 포장한다는 느낌도 없고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한다는 그런 느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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